요즘 애들

🔖  이번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여준 대단히 중요하고도 명확한 사실은, 망가지고 실패한 게 단지 하나의 세대가 아니라는 거다. 망가진 건 체제 자체다. (...)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번아웃은 사회적 문제다. 생산성 앱, 불렛 저널, 마스크팩 피부 관리, 망할 놈의 오버나이트 오트밀 따위로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치유책에 끌리는 건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규율과 새 앱, 더 나은 이메일 정리법, 또는 식사 준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만 더하면 우리 삶이 다시 중심을 잡고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미디어가 쉽게 장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벌어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일 정도에 불과하다. 일시적 출혈은 멈춰줄지 몰라도 반창고가 떨어지면, 기분은 더 가라앉을 것이다.

🔖  열정을 쏟을 만한, 멋진 직업을 욕망하는 것은 굉장히 현대적이며 부르주아적인 현상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욕망은 노동자들이 멋진 일에 따르는 영광을 위해 모든 형태의 착취를 견디게끔 했다. 또한 특정 유형의 직업과 노동을 갈망하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하지 않게 된다”라는 수사법은 번아웃으로 빠지는 덫과 같다. 노동을 열정의 언어로 은폐하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건 그냥 일이지, 우리의 인생 자체가 아닌데도 말이다. (...) 이 방정식은 애초에 번아웃으로 가는 직행 열차인 일과 삶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고, 일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된다. 하루 일과(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 혹은 자아(일하는 자아와 진짜 자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자신의 자아 전체를 좋아할 수 있는 일에 쏟아 붓는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는 행복과 재정적 안정 모두 얻을 거라 기대하는 하나의 기다린 뫼비우스의 띠만 남는다.

🔖  아웃소싱은 직원에게 안정적인 임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직원들의 근무 생활을 개선하지도 않는다. 아웃소싱이 하는 주식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그럼으로써 주주들과 401k에 가입한 운 좋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아웃소싱된 사람들의 임금을 바닥에 깔고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절실하게 어떤 일자리든 찾으려 하기 때문에 아웃소싱된 노동자들을 채용하는 회사 측에서는 그들에게 안정성, 규칙적인 근무 스케줄, 복지를 제공할 유인이 없다. 이런 근무 상황은 번아웃을 악화시키는 걸 넘어 번아웃을 만들도록 설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설계의 핵심에는, 선택지가 부족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이용해 큰돈을 버는, 선택받은 소수가 있다.

🔖  한때 우버 측에선 운전자가 연간 9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이후 철저하게 반박당했지만) 긱 경제에서 운전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남는 침실을 빌려주거나, 쉼 없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사람들은 이 일을 n잡으로 삼고 있다. 시궁창 일자리를 보조하기 위한 또 다른 시궁장 일자리인 것이다. 긱 경제는 전통 경제의 대체제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전통 경제가 망가지지 않았다고 설득하면서 전통 경제를 받쳐 주는 존재다. (...) 프리랜서로 일한다는 건 ‘나쁜 건 전부 좋고, 좋은 건 전부 나쁘다’라는 사고방식에 빠진다는 뜻이다. 이는 힘든 노역이 훌륭하게 느껴지고, 실제로 즐거운 활동들이 지울 수 없는 죄책감에 물든다는 점에서. 우버는 바로 이 사고방식을 착취한다. 운전자가 콜을 거부하려 앱을 닫으려 하면, 여러 가지로 변형된 메시지창이 뜬다. “정말 앱을 끄겠습니까? 당신 지역의 수요가 대단히 높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버세요. 지금 멈추지 마세요!”

🔖  우리 자신과 가족을 위해, 때론 동료들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길지 않은 여가 시간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사실 계급 불안과 직결된다. (...) 다시 말해 엘리트 지위를 강조해 보여주는 여가 활동이나 미디어 상품 감상, 구매를 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당신은 곧 당신이 먹는 것이자, 당신이 읽는 것이자, 당신이 보는 것이자, 당신이 입는 것의 총체니까. 사실이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다니는 체육관이자, 휴가 사진을 올릴 때 사용하는 보정 필터이자, 휴가지이기도 하다. (...) 내가 발견한 사실은 아직 취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고 취미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실패해도 된다고, 불완전해도 된다고 폭넓게 허락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테이블을 만들 때, 완성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보다는 만드는 과정을 즐긴다. 혹은 하이킹을 할 때, 정상에서 찍은 전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과 하이킹하는 사람이 된다는 페티시보다 하이킹 경험 자체를 즐긴다.

🔖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 상태가 단순한 일 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당신에게서 일할 능력을 뺏는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더 발굴해 낼 자아가 남아 있을까? 아무도 당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 제일 저항이 적은 경로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때, 당신이 뭘 좋아하고 뭘 좋아하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을 아는가? 자신에게 다시금 전념하고 자신을 아끼는 것인 이기적이지도, 자기중심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이는 가치의 선언이다. 당신이 일을 하고 소비하고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번아웃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그 수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  문제는 아버지가 여가 시간을 누릴 자격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많은 아버지가 본인의 여가 시간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  원인은 체제에 있다. 이것이 전체를 아우르는 해결첵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육아의 기본적 구조를 바꾸면 육아가 주는 느낌도 바뀐다. 이것이 심리학자이자 가족 심리치료사가 쓴 <엄마 번아웃>이나 역량 증진 전문가가 쓴 <여자들이여 사과를 그만두라> 같은 책에 육아 번아웃의 해결책이 들어 있지 않은 이유다. 이런 책들은 피로의 증상을 다루지만 피로의 더 큰 구조적 원인을 다루는 건 피한다. 로크먼이 대단히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 노동이 지속 가능하고 공정하게 분배되게끔 가족 환경을 꾸리는 주된 방법은, 부모 중 출산을 하지 않는 쪽이 오래 육아휴직을 쓰는 것이다. 혼자서 쓰면 더 좋을 것이다. 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노동이 - 무엇보다도, 정신적 짐을 부당하는 노동을 포함해서 - 휴직을 하는 동안 눈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  어떤 반박이 뒤따를지 안다. 누구나 육아를 최우선으로 두기 마련이며,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속한 업계와 내 전문 분야는 이미 너무나 불안정했다. 온종일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긴다는 건, 남들과 차별화할 능력을 빼앗기는 거다. 물론 내겐 사랑하는 아기가 생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아마 일이 줄어들거나 일을 아예 못하게 되겠지. (...) 오늘날 아이들은 박사 학위보다 훨씬 가치 있게 우리 인생을 부숴놓지만,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충동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 건 옳은 일처럼,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처럼,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처럼 느껴진다. 가혹한 현실이 당신에겐 그렇게 가혹하지 않거나,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으리라 부인하게끔 만든다.

🔖  우리가 아이를 늦게 낳거나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기보다 커리어를 훨씬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사회에서 우리가 육아와 일을 둘 다 해낼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확인하려 악전고투한다. 여자들은 이미 이등시민이다. 어머니가 되면 더더욱 이등시민이 된다. 그리고 그 지위가 옳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런 운명을 거부하는 삶을 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  그러나 우리가 이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혹사시킬 인내심과 적성과 자원이 있다면, 우리에겐 분명 싸울 힘도 있을 것이다.